죽음의 철학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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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04-19 09:33 조회552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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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장. 철학적 죽음관
1. 철학자들의 죽음관
1) 소크라테스의 죽음관
다음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앞두고 심미아스와 나눈 대화를 간추린 것이다.
‘죽음은 존재하는가?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이다. 죽는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의 완성이다. 영혼이 독립해 있어서 육체로부터 해방되고 육체가 영혼으로부터 해방될 때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따라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비통해 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재물이나 권력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자이다. 산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으로부터만 태어난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면, 저 세상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해질 것이다. 이것을 증명해 보이겠네.
이 문제는 인간에 국한 시켜 고찰하지 말고 동물 전체, 식물 전체, 생성하는 모든 것에 관련시켜서 고찰하기로 하겠네. 반대되는 것을 갖고 있는 것은 모두 그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 아닌가? 나는 모든 반대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동일한 교체 관계가 있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네. 큰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으로 되고, 강한 것은 약한 것에서부터 강한 것으로 되고 빠른 것은 느린 것에서부터 생겨나고, 또한 나쁜 것은 좋은 것으로부터, 옳은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고, 모든 사물이 이와 같이 보편적인 반대 관계에서 언제나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생성 곧 갑으로부터 을로 을로부터 갑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있지. 분할과 결합, 냉각과 가열 등 많은 것이 그와 같네. 그러면 삶의 반대는 무엇일까? 죽음 아닌가? 죽음과 삶이 서로 반대 관계에 있다면, 죽음과 삶은 각기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고, 또 한 가지 생성과정도 있겠지? 그러므로 산 것은 죽음으로부터 생기고 죽은 것은 산 것으로부터 생긴다.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긴다는 것이지. 그것은 죽음에 대응하는 생성과정이 있는 것이고, 죽은 존재가 살아 있는 존재로부터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존재는 죽은 존재로부터 생긴다는 결론에 도달하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은 자의 영혼은 어떤 곳에 있다가 거기서 다시 살아난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가 되네. 만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죽고 죽은 다음에는 죽은 상태로 영원히 머물러 있어서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것은 죽게 되고 산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혼은 육체에 속박되고 갇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소크라테스의 변명 [파이돈]편)
자! 나는 그대들에게 참 철학자란 죽음이 임박했을 때 기쁜 마음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고, 또 죽은 연후에는 저 세상에서 최대의 선을 얻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오. 죽음은 영혼과 신체의 분리가 아닐까?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이 분리의 완성이 아닐까? 영혼이 신체를 떠나 홀로 있고 또 신체가 영혼을 떠나 홀로 있으면, 이것이 다름 아닌 죽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면 영혼은 언제 진리에 도달하는 것일까? 신체와 더불어 무엇을 탐구하려 하면 영혼은 속을 것이 뻔하니 말일세, 참 철학자들만이 도대체 영혼을 이와 같이 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야. 신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와 해탈이야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고 실천하는 바가 아닌가? 그러나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신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철학을 연구하고 신체를 완전히 해탈하여 순수하게 된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요, 그밖에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일일세.(플라톤, 파이돈, 64a-82c)
사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여러분이 지혜가 없으면서 지혜가 있는 듯이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모르면서도 안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면서 마치 그것이 가장 나쁜 것임을 잘 알고 있기나 한 것처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난받을 만한 무식, 곧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는 무식이 아닙니까 ?
죽음은 다음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곧 죽으면 아무것도 아닌 없는 것이어서 죽은 사람은 전혀 아무 감각도 없거나 아니면 전해 내려오는 말처럼 영혼이 여기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바꾸어 옮겨 사는 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처럼 죽음이 만약 아무런 감각도 없어서 꿈 한번 꾸지도 않는, 깊은 잠 같은 것이라면 죽음은 놀랄 만한 이득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두 번째처럼 죽음은 영원히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따라서 죽은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결국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동양의 사상에 근접한 윤회적 사상을 지닌 것으로 보여지며 당시의 상황 속에서 죽음과 영혼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라는 책을 쓴 저자가 플라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플라톤의 생각도 이와 같거나 플라톤의 생각일 것이다.
2) 하이데거의 죽음이해
M.하이데거는 죽음에의 존재로서 인간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죽음이 고유한 것이며, 결코 남과 바꿀 수 없는, 반드시 찾아오는 그리고 그것을 초월해서 살 수 없는 가능성이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야스퍼스는 한계상황에서의 자기가 유한(有限)이라는 체험이야말로 포월자(包越者)와의 실존적인 교섭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하고 하이데거는 언제, 어디에서 찾아올지도 모르는 죽음의 불안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지라고 호소하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던져진 존재, 세계 내의 존재, 죽음에 이르는 존재로 파악하였고, 죽음은 비 본래적인 나로부터 본래적인 자아를 회복시키는 계기로 보았다.
형이상학이란 자연현상 내지 물리 현상을 뛰어 넘어 그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어떤 초월적이고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즉, 신의 문제, 궁극적 실체의 문제, 존재의 문제, 영혼불멸 내지 삶과 죽음의 문제 등 실존철학의 주제를 이론적으로 파고든다. 존재를 탐구해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본질적 측면’을 탐구해 들어가는 방법, 다른 하나는 존재의 ‘현실적 측면’을 탐구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오늘날은 본질을 떠나 현실적인 측면을 더 중시한다. 결국 존재의 본질적 측면보다는 존재의 현실적 측면을 주로 문제 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실존철학의 근간이다. 따라서 많은 실존철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데에서부터 철학을 시작한다.
하이데거의 인간의 정의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내 존재인 동시에 던져진 존재이며 또 죽음에의 존재이다. 우연히 세계 속으로 던져졌다고 보았다. 던져진 순간부터 인간은 스스로 미래를 계획하면서 살아야 하며, 삶을 리드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인간 생명의 구조적인 특징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실존적 삶을 자각하지 못하고, 대부분 막연한 일상성 속에서 생활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이 실존적 존재로서의 죽음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서는 오직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죽음은 바로 이러한 일상성에 빠져 있는 일반인들에게 삶의 실존성을 자각하고 본래적 자기를 회복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에 하이데거는 ‘죽음은 생의 의미이며, 생의 완성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본질'은 그의 실존에 있다." 또는 '인간의 실체는 실존이다.' 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의 가능성에 대해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가능성은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 그 가능성으로 선구하는 현존재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하도록 만들고, 그리하여 은폐되어 있던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회복하게끔 한다. 그래서 죽음의 가능성은, 결론을 먼저 말한다면, 세계내부적인 다른 존재자들에의 퇴락으로부터 현존재를 자유로워지게끔 만드는 동시에 현존재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근거 짓게끔 만드는 것으로서, 현존재의 자유와 자기 정초(Begründung)를 가능하게 한다는 의의를 갖는다.
3) 야스퍼스의 죽음이해
야스퍼스의 죽음이해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인간의 죽음은 한계상황으로 초월자를 만나는 실존적 계기가 되는 즉 인간은 상황내의 존재로 파악했다. 여기서 상황이란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 죽음이나 운명과 같은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없는 극한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죽음과 같은 한계상황에 봉착하여 일상성에서 탈피하여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고 실존을 자각하는 순간이며 신과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는 없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간접적 체험을 반성하고 고찰함으로써 죽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실존철학이 다루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이해되고 있는 죽음의 뜻이다. 야스퍼스는 죽음을 고뇌· 다툼· 부채 등과 함께 한계상황으로서 파악하였다.
정신과 의사였던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은 상황 내의 존재로 보고 있다. 이때 상황은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피할 수 있는 상황’이고 또 하나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란 한계상황 내지 극한 상황이다. 즉음은 바로 이런 피할 수 없는 상황중 대표적인 한계상황이다. 죽음은 피할 수도, 연기할 수도 없다. 또 누구도 대신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죽음에 직면하게 될 때, 사람들은 정신적 마시상태 내지 공황상태에 빠지고 크게 절망, 좌절한다. ‘인간은 한계상황에서 좌절, 난파당할 운명에 놓여 있으나, 사랑과 신앙을 통하여 신에게로 초월할 수 있다’고 야스퍼스는 주장했다.
4) 그 밖의 철학자들의 죽음이해
우리 인생의 모든 다른 행위들은 이 마지막 행위(죽음)를 위해 시험받고 시련을 겪어야 한다. 죽는 그날은 내가 보낸 모든 세월을 심판해볼 날이라고 어느 옛 사람은 말했다. 그때 내 말이 입에서 나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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